고려의 정치·사회와 문화 발전
1.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체제 정비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고려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성립하였습니다. 918년 왕건은 송악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발해 유민도 포용하며,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한 후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국가 기틀 마련
태조 왕건은 혼인 정책을 시행하고 호족 우대와 견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며 북진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훈요 10조를 통해 후대 왕들에게 중요한 정책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광종은 황제 칭호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하여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관리 등용의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여 유교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체제 개혁을 진행했습니다.
통치 체제의 정비
고려의 중앙 정치 조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중서문하성은 국정 총괄을 맡은 최고 관서였고, 도병마사는 국방을 담당했습니다. 식목도감은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며, 상서성, 병부 등 여러 기구가 정책 집행과 군사를 맡았습니다. 지방 행정은 5도와 양계로 나누어 각각 안찰사와 병마사가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2. 고려의 대외 관계와 국제 질서
거란의 침입과 격퇴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서희는 1차 침입에서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하며 고려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2차와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귀주대첩에서 격퇴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여진과의 관계 변화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을 창설하고, 동북 9성을 설치하여 여진에 대응하였으나, 여진이 금을 세운 후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이를 수용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습니다.
고려의 독자적 천하관
고려는 송, 거란, 여진과의 관계를 통해 다원적 국제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고려는 자신을 중심국가로 인식하며, 황제 칭호와 독자적 연호 사용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 국왕은 천자, 폐하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확립했습니다.
3. 고려의 사회 구조와 변동
문벌 사회와 권문세족
고려는 문벌 사회를 특징으로 하였으며, 문신과 무신의 세력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들의 차별과 권력 독점은 사회적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이자겸의 난에서는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였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아 서경을 천도로 삼고 금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개경 세력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 후 묘청과 서경 세력은 반란을 일으켜 진압되었습니다.
무신 정권의 성립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이 주도하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고, 최씨 무신 정권이 60여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방과 도감 등의 기구가 설치되어, 무신 정권은 정치적 권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4. 고려의 종교와 사상
불교의 발달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며 승과 및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통해 불교적 의례를 중시했습니다. 주요 승려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천은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고, 교관수를 주장하여 불교의 교리와 수행을 결합시켰습니다. 지눌은 수선사를 중심으로 결사 운동을 전개하며 정혜쌍수를 주장했습니다. 요세는 백련사에서 결사조직을 만들어 불교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도교와 풍수지리설
도교는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종교로 도교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풍수지리설은 서경 천도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묘청의 주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학의 발달
유학은 고려의 국정 개혁과 과거제 시행을 통해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성종은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관학과 국자감을 건립하여 유학 교육을 활성화시켰습니다.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성균관을 정비하여 성리학 연구를 체계화하였습니다.
5. 고려의 외세와 변화
몽골의 침입과 대몽항쟁
몽골의 침입은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살리타를 처치하며 몽골의 기세를 꺾었고,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몽골과 강화협정을 체결하여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습니다.
원의 간섭과 고려 사회의 변화
원의 간섭은 고려의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권문세족의 성장과 국왕의 지위 격하가 이루어졌으며, 정동행성의 설치로 고려는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갔습니다.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추진하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 회복을 이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