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개항 이후 근대적 개혁의 추진
1.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대전동편과 통치 체제 재정비
배경: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폐단과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 봉기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비변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의정부의 기능 회복과 삼군부 부활 등을 통해 국정을 재정비하려 했습니다.
대전회통: 대전동편은 정조 시기에 편찬된 법전의 후속으로, 흥선대원군 시기에 법전의 보완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법적 체계를 정리하여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
경복궁의 중건은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기부금을 원납전으로 강제 징수하는 과정에서 담백전이 발행되었습니다. 이 화폐는 물가 폭등을 초래하고, 양반과 백성들의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담백전은 유통이 중단되고, 최익현의 상소로 혁파되었습니다.
삼정의 문란 해결
삼정의 문란은 전정, 군정, 환곡의 부패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양전 사업과 호포제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특히 서원 정리를 통해 면세 혜택을 받던 서원들을 철폐하고, 일부만을 남기고 조세 부과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2.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병인양요(1866)
병인양요는 프랑스와 천주교 포교 금지 여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발생했습니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강화도가 침략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문화유산 약탈 및 문수산성, 정족산성에서의 항전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을 고조시키며, 병인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통상 요구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조선 정부의 거부로 상선이 공격당하고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전초가 되었으며, 미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미수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서양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서양 열강에 대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신미양요(1871)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배상금과 통상 요구를 밀어붙였고, 이에 조선 정부는 강경 대응을 하였습니다. 강화도와 영종도가 미국 함대의 침략을 받으며, 조선군은 항전을 벌였고, 미군은 철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서양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3. 개항과 서양 열강에 대한 문호 개방
개항과 통상 개화론
통상 개화론: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은 조선의 개항을 주장하며 서양 열강과의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정한론(조선 침략론)을 대두시키며, 개항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수교 거부 정책으로 거절당했습니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1876)
배경: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일으킨 뒤, 이를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 내용: 부산과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 개항을 규정하고, 일본의 치외법권과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 결과: 조선은 자주권을 침해받고, 일본과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책략과 서양과의 교류
조선책략: 청의 외교관 황준헌은 조선이 중국, 일본,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의 수교: 미수호통상조약(1882) 체결을 통해 미국과의 무역과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4. 개화 정책과 개화파의 분화
개화파의 분화
개화파는 급진개화파(김옥균, 박영효 등)와 온건개화파(김홍집, 김윤식 등)로 나뉘었으며, 이들은 서양 문물 수용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차이로 대립했습니다.
- 급진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서양 문물 수용을 주장했고, 온건개화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청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
갑신정변(1884)
배경: 급진개화파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결과: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으며,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거문도 사건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고, 이후 청의 압력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