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경제·사회·문화의 변화
1. 열강의 경제 침탈
개항 초기의 무역 상황
일본 상인의 특권: 강화도 조약(1876) 및 부속 조약을 통해 일본 상인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이 특권에는 영사 재판권과 일본 화폐 사용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 제한: 일본 상인은 개항장 10리 이내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나, 일본 상인들은 조선 상인(객주, 여각, 보부상 등)을 중개인으로 활용해 무역을 전개하였습니다.
일본과 청의 무역 경쟁
배경: 임오군란(1882) 이후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청 상인의 특권 보장과 상점 개설 허용, 영사 재판권 인정 등을 포함했습니다.
조일 통상장정(1883): 일본은 청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 및 최혜국 대우 규정을 요구하였고, 이는 청·일본 상인 간 상권 경쟁을 심화시켰습니다. 조선 상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열강의 이권 침탈
일본의 금융·재정 장악: 일본은 차관 제공을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켰고, 화폐 정리 사업에서는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타가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동화 등 구화폐는 일본 제일 은행권으로 교환되었습니다.
일본의 토지 약탈: 일본은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대규모 토지 차지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2. 경제적 구국운동
방곡령
배경: 일본 상인들의 지나친 곡물 유출과 흉년으로 인한 곡물 가격 폭등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방곡령 사건: 함경도와 황해도 등지의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선포하였고, 이에 대해 일본은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을 내세우며 방곡령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방곡령 철회와 배상금 지급이 이루어졌습니다.
상권 수호 운동 및 은행 설립
배경: 외국 자본의 내륙 진출에 대응하기 위한 상권 수호 운동과 은행 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상회 설립: 시전 상인들은 외국 상인의 철수를 요구하는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대동 상회와 장동 상회와 같은 상회가 설립되었고, 조선은행과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어 국내 자본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권 수호 운동
배경: 아관파천 전후로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습니다.
독립협회 활동: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와 프랑스·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한 독립협회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또한,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
배경: 일본의 강요로 막대한 차관이 도입되면서, 대한제국의 재정은 일본에 예속되었습니다.
경과: 서상돈 등이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결과: 동감부의 탄압과 방해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3. 근대 의식의 확산과 근대 문물의 수용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을미 개혁 등을 통해 평등 사회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또한, 독립 협회의 민권 운동을 통해 근대 의식이 성장하고, 특히 여성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확대되었습니다.
의식주의 변화
서양 음식(커피 등), 양복과 양장, 서양식 건축물 등의 보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근대적인 시간관념을 포함한 근대 의식의 확산을 나타내며, 외세의 침략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근대 시설의 도입
교통
전신(국내 및 청, 일본과 연결), 전차(서대문~청량리 구간), 철도(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 도입.
전기
경복궁에 전등이 설치되고,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의료
광혜원과 대한 의원이 설립되어 근대 의료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건축
독립문, 명동 성당, 덕수궁 석조전 등 근대적인 건축물이 건립되었습니다.
4. 근대 교육의 전개
육영공원: 1886년에 설립되어, 관료 및 지식인 자제들을 대상으로 근대 학문과 외국어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원산 학사와 동문학: 근대 학문과 외국어 교육을 위한 기관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배재 학당과 이화학당: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 학교들로, 근대 학문을 교육하는 주요 기관이 되었습니다.
교육입국조서(1885):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 등 관립 학교들이 설립되었습니다.
5. 언론 활동과 민족 의식 고취
신문 발행: 독립신문(한글판, 영문판 최초),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양기탁, 베델 등이 운영) 등 다양한 신문들이 민중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중요한 매체 역할을 했습니다.
언론 탄압: 일제는 신문지법(1907)을 통해 언론 활동을 탄압하며, 민족의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6. 종교계의 동향
유교: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불교: 한용운은 일본 불교에 저항하며, 불교의 독립적 입지를 주장했습니다.
천주교: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며 사회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근대 계몽 사학: 위인전 간행과 이순신전 등의 서적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