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년대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1. 일제의 식민지 통치 제도
조선 총독부
설치: 1910년,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의 최고 기관으로 설치됨.
조선 총독: 일본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며, 입법, 사법, 행정 및 군사권을 장악.
기능: 총독부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직속 통치 기관으로, 모든 행정, 사법, 군사 권한을 갖고 한국인을 통제함.
중추원
기능: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로, 친일파 인사들이 대거 임명되어 일본의 지배를 지원.
구성: 조선 총독의 자문을 맡는 중추원은 일본 정부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협력하는 역할을 했음.
일제의 무단 통치와 경제 수탈
헌병 경찰 제도: 헌병들이 일반 경찰 업무를 수행하며, 즉결심판권을 행사함. 이는 일본의 무단 통치 방식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됨.
조선 태형령: 1912년 제정되어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적용, 강압적인 사회 통제를 가능하게 함.
기본권 박탈: 한국인의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었으며, 한국인 신문들이 폐간되기도 했음.
식민지 교육: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위주로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었고, 민족 교육은 탄압당함.
2. 경제 수탈
토지 조사 사업 (1910~1918)
목적: 대한 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재정 확보와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토지 조사를 실시.
전개: 토지 소유자를 신고하게 하고,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많은 토지를 헐 값에 매입.
결과: 한국의 많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게 되었음.
국내 산업 침탈
회사령 공포 (1910): 일본은 조선 총독에게 회사 설립 허가권과 해산권을 부여, 일본 기업들이 조선 내에 본격적으로 침투.
자원 통제: 어업령, 삼림령, 광업령 등의 법령을 공포하여 자원의 관리와 수탈을 강화.
3.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와 경제 수탈
문화 통치
배경: 3·1 운동(1919) 이후 한국인의 반발을 잠재우고,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 분열을 도모하려는 목적.
내용: 조선 총독에 문관 출신도 임명 가능하다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문관 출신 총독은 임명되지 않았음.
헌병 경찰 제도 폐지 후 보통 경찰 제도를 실시, 경찰 인원·관서 증가 및 치안 유지법 제정(1925)으로 감시와 탄압 강화.
수리조합
배경: 민간의 농업 관련 관리 강화, 일본의 농업 수탈 목적.
목표: 농민들에게 수리조합을 만들어 농업 기반을 강화하며, 그 비용은 농민 부담으로 전가되었음.
산미 증식 계획 (1920~1934)
목적: 일본의 공업화 진전에 따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쌀을 대량으로 확보하려는 계획.
결과: 일본은 농업 증산을 위해 토지 개량, 개간, 수리 사업 등을 추진했으나, 증산량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유출되었고, 한국의 식량 사정은 악화됨.
4. 국내외 민족 운동
국내 민족 운동
독립 의군부: 의병장 출신인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1912년에 조직,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며 복벽주의를 추구.
대한광복회: 박상진 등이 1915년에 군대식 조직으로 결성, 무장 독립 전쟁 준비를 하며 군자금 모집.
국외 민족 운동
북간도: 중광단 결성, 후에 북로군정서로 발전. 광단은 명동학교와 삼원보를 중심으로 활동.
서간도: 신흥 강습소 설립, 후에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대조선 국민 군단 등이 독립군 자금 지원 및 독립 운동을 위한 단체들을 결성.
5. 3·1 운동
배경
국내: 일제의 무단 통치와 수탈에 대한 반발이 심화되었고, 고종의 서거로 인한 민족적 분노가 폭발.
국외: 민족 자결주의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대두되었으며,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자결주의 원칙이 영향을 미쳤다.
경과
시작: 종교계(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 선언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 주요 장소는 탑골공원으로, 비폭력적인 시위가 특징이었다.
전개: 서울, 평양, 원산 등에서 시위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농촌에서도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발생.
일제의 가혹한 진압: 제암리 학살 사건 등에서 보듯, 일본은 가혹한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
영향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3·1 운동 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다양한 임시 정부들이 통합되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운동 활성화: 3·1 운동은 이후의 무장 투쟁, 노동·농민 운동 등 다양한 민족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식민 통치 방식의 변화: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면서도, 여전히 탄압을 강화함.
6.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수립
배경: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고, 각지에서 활동하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할 필요성이 대두됨.
과정: 한성 정부와 상하이 정부의 통합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음.
활동
조직: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임시 의정원(입법),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임명.
국제 활동: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국제 사회에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
자금 모집: 연통제를 통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교통국을 통해 정보 수집과 분석을 진행.